아브라함이 내린 결단

February 18th, 2018

ICA Sunday Pulpit Message



<서론> 두 마음은 불신앙에서 오고, 전심은 믿음에서 나온다.

요번에 한국에 나가서 중국 식당에 갔었는데 갈 때마다 갈등을 하게 됩니다. 짜장면도 맛있고 짬뽕도 맛있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갈등을 하게 됩니다. 두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웃자고 하는 작은 예입니다. 우리가 실생활을 살면서 두 가지 마음을 갖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두 가지의 마음으로 인하여 갈등을 겪는 경우를 자세히 보면 불신앙에서 나오는 모습 입니다. 그리고 다른 경우로는 전심으로 모든 마음을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 같은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계산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상황 때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바로 믿음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게되면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는만 큼 두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 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천국에 가보지 않았지만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천국에 가는 신분이 보장됐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예수를 우리는 한 번도 목격하지 못 했습니다. 그가 물위를 걷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장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씀과 그분이 했던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받아드리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과 일이 내게도 이루어지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믿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믿음이 사실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가 구하게 되면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후하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 내가 원하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실 수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를 주시는 주님께서 믿음도 주실 줄 믿습니다.

저를 돌아보면서 왜 내가 두마음을 품게 되었는가 이유를 찾아봤습니다. 혹시 내가 이렇게 결정을 하는 바람에 손해나 피해를 보지 않을까? 실패하면 어떡하지? 멸망을 당하거나 죽으면 어떡하지? 라는 이런 당연한 질문에 확실한 대답이 없기 때문에 갈등을 하고 두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실제로 신자, 불신자 모두에게 질문은 옵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문과 의문 다음에 내가 확정짓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결론 내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 기도하게 되면 확정된 고백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문제를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사건 전체를 주관하신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바로 내 아버지이시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내게는 유익이다. 하나님께는 영광이다.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그 결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확정의 고백이 없기 때문에 두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결과, 준비하신 결과 속으로 들어가서 내게 손해가 되면 손해를 보겠다. 피해가 나면 피해를 당하리라. 실패가 오면 실패를 맞이하겠다. 멸망하면 멸망 속으로 들어가겠다.’ 에스더 4장 16절에 나오는 에스더의 고백 같은 것입니다. ‘...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다니엘서 3장 17-18절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역시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고백과 자세로 나를 확정시키는 것입니다. 어떠한 손해, 피해, 실패가 와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이루십니다. ‘내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내가 비록 멸망에 처한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결과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들어가고 저래도 들어가겠다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 입니다.

어려운 일이 오게 되고 위기가 닥쳐서 그곳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되면 일은 뒤집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요셉이 손해와 피해를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애굽에 진출하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왕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왕 때문에 도망 다니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 곁에 충신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도망 다닐 때 함께 했던 친구들이 나중에 충신이 되어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붙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다윗이 누렸습니다. 호사다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안 좋은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갑자기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만일 다윗에게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다윗은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솔로몬에게 그 다음 왕위를 넘겨야 했는데 다윗에게는 가짜 충신들도 붙어있었습니다. 가짜들은 다윗 왕 앞에서는 벌벌 기었지만 어린 솔로몬 앞에서는 반역을 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일어난 쿠데타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묘수, 묘책이었습니다. 다윗 왕에게 붙었던 수많은 신하들이 반역이 일어나자 반으로 편이 갈렸습니다. 도망자 시절부터 변치 않고 함께 했던 충신들은 다윗과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다윗의 영화 때문에 붙었던 사람들은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붙었습니다. 충성도를 테스트를 하지 않고 저절로 반으로 갈린 것입니다. 압살 롬이 죽자 쿠데타는 자연스럽게 가라앉았고, 압살롬에게 붙었던 사람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진짜 충신들만 아들 솔로몬에게 넘겨줬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간수와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간수의 가정을 구하지 못했다면 빌립보 교회를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세요. 다 역전되는 이야기입니다. 평탄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신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문제가 절대 문제가 아닙니다. 기회입니다. 응답 받는 길 입니다. 축복의 발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결과 속으로 담대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이것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당해도 될 고난을 사서 당하게 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완전한 축복을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첫번째 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축복을 예비하시고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네 본토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대아우르 집에서 우상 만들어 팔던그 신세를 벗어나라 라는 말입니다.‘너희조상때부터우상장사를하던그과 거로부터, 과거에서부터 묶여있던 우상배경에서 내가 빼내겠다.’ 이것을 못 알아차린 것입니다. 과거 문제에서 영원히 끝내겠다는 것을 못 알아차린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금 복의 근원으로 삼겠노라. 이제부터 내 말씀을 따라 인도받는 너는 복의 근원이다. 앞으로 복을 받을뿐만 아니라 지금 복의 근원이다.’ 현재 신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안 믿겨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12장 3절에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축복까지 준비해 놓으신 것을 확정하셨습니다. ‘미래에 모든 족속을 너를 통하여 살리겠다. 아브라함아 너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완성할 것이다. 그 복음을 받는 자는 모두가 영원한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완전한 축복과 영원한 응답을 위해서 나오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설교이지 내게는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부분적 순종으로 인해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겠는가? 안 믿어지기 때문에 안 움직인 것입니다. 그러다가 형, 하란이 죽고 나서 조금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데라마저 죽었습니다. 두 번 가족이 죽은 이후에 가나안 땅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부분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분적인 순종 때문에 고난을 겪었습니다. 나오라는 말씀에는 순종했지만 부분적으로 순종하여 중간에 멈춘 것입니다. 중도에 포기한 것입니다. 이때 형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줄초상을 당한 것입니다. 간신히 깨닫고 가나안에 도착을 했는데 기근이 들고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 다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여쭈어 보지 않고 바로 애굽으로 갔습니다. 음식을 찾으러 간 것입니다. 굶어 죽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때 사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사라를 간신히 되찾고 나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숨을 돌릴만 하니까 조카 롯과 분쟁이 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창세기 13장입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내려놓고 나오라고 했지만 조카 롯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이해는 갑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습니다. 조카 롯을 의지하면서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다 내려놓고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을 데리고 나온 부분적인 순종입니다. 두 마음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집안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 필요했지만 이제는 너마저 내가 내려놓겠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순복해보자.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라가자.’ 롯을 불러서 네가 갈 곳을 정하라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롯이 어디를 선택하든 아브라함은 반대로 가겠다고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채울 것을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결국 롯은 비옥하고 사람이 많은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여 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계산적으로는 손해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비한 결과 속으로 아브라함은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한 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3. 아브라함의 온전한 순복 후에 하나님은 축복의 언약을 주셨다.

그것이 세 번째입니다. 축복의 약속을 확정하셨습니다. 좋은 지역과 땅을 포기했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조카 롯 때문에 손해를 감수했더니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눈을 들어서봐라. 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재산 중의 재산이 땅이었습니다. 네가 보는 모든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는 모든 땅 즉, 차고 넘치게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확정했더니 하나님이 언약으로 확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 후손을 땅에 티끌과 같이 번성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형통하고 응답받는 것보다 기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공하고 응답받고 신앙의 훌륭한 모범이 된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 축복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예비 하셨더라도 그 속으로 들어가야 축복의 언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너의 발로 걸어라. 밟는 모든 땅을 너에게줄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땅, 밟는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은 네가 만족할 만큼 마음껏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부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함을 약속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열방을 살릴 정도로 풍성함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살리는 믿음의 거부로, 재물로 살리는 재물의 거부 이렇게 만들겠다고 하나님이 확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결단하고 확정하게 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이 내게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영적인 축복, 육신적인 축복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결론>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롬11:29)

결론을 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확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무엇을 확정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함이 없느리라.’ 로마서 11장 29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확정된 축복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왜 두 마음을 가집니까? 과연 이루어질까? 이렇게 선택했는데 손해, 피해를 볼 것인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있습니다. 담대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인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믿음을 받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고백으로 확정하십시오. 그러면 준비된 하나님의 축복이 확정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