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인가 아니면 믿음인가?

April 15th, 2018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 우리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느낌이 온다. 상대방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어느정도 느낄 수 있다. 이 사람이 말만 많고 내실이 없는 사람인지 느낄 수 있고, 또는 이 사람이 말은 많이 하지 않지만 무언가 가지고 있구나 느낄 수 있다. 또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될까 생각이 들 수 있다. 또는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이 바뀔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수 있다. 이것들이 느낌으로 온다. 그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 판단한 것을 가지고 선택하고 결정을 한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 대하여 우리가 말도 하고 행동도 취하게 된다. 그 기준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오늘은 느낌이냐 아니면 믿음이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다.

 

1. 세상에서는 느낌이 정확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자가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 첫번째이다. 세상에서는 느낌이 정확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 종종 성공을 한다. 단기적인 성공이지 궁극적인 성공은 아니다. 즉, 참된 성공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 중에 부동산 투자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시세의 흐름을 잘 읽는 사람은 돈을 투자해서 돈을 번다. 우리 교회 부지 2 acre 땅이 두배로 올랐다. 그렇게 올랐던 것이 참 아쉬웠던 적이 있다. 우리가 땅과 건물을 사고 4-5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교회 앞집의 땅 2 acre 를 사려고 물어봤었다. 예전에는 우리가 3십만불에 땅을 사서 당연히 그 정도 하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땅 값이 올라서 6십만불이라고 하니 명함도 못 내밀었다. 제가 시세의 흐름을 잘 못 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다. 지금 이 같은 때에 어떤 직종을 가지면 돈을 많이 벌겠구나 생각을 한다. 기업도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의 어떤 아이템이 돈이 되겠는가 연구를 한다. 우리가 유식하지 않더라도 가면 갈수록 컴퓨터가 발전하는지 알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이 각광을 받겠구나 느낌이 온다. 그런 상황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국가도 그렇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바로 옆 나라, 일본에서 군수산업이 굉장히 많은 덕을 봐서 그때 돈을 많이 벌었다.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어마어마한 물자가 들어갔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 월남전쟁이 터졌을 때는 한국에서 군인을 파견했고 그 덕분에 한국의 경제가 덕을 봤다. 이렇듯 상황과 흐름을 잘 느끼고 잘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종종 돈을 벌기도 하고 부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인간의 느낌과 촉, 생각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 인간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무리 느낌이 빠르고 잘 판단을 해도 그것이 오래갈 수 없다. 결국 구멍이 나게 끔 되어있고 무너지게 끔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봐야 한다. 성경의6가지 경우를 찾아보면서 어떨 때 성공하고 실패하는가 우리가 분명히 잡아야 한다. 세상에서는 이런 느낌, 생각이 중시되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믿음의 사람을 쓰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축복하신다. 지금부터 몇가지 예를 들겠다.

 

2.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인도 받는 자를 기뻐하시고 필히 축복하신다.

▶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이다. 이 첫번째 죄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고통과 재앙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지만 첫 여자가 그 말씀을 놓쳤다. 왜 놓쳤는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평생 불순종하겠다 라고 사명을 띄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게 무너졌는가? 창세기 3장을 보시면 여자가 그 선악과를 본즉 이라고 나와있다. 보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느낌이 올라 온 것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자신의 생각이 올라 온 것이다. 눈에 본 느낌 그대로 먹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즉, 인간의 원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고 느낌과 생각대로 선택해서 벌어진 결과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는 내가 눈에 보는 그대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인류에 실패가 온 것이다. 성경에 그 부분을 가장 먼저 기록해 놓았다. 착하게 살아라 열심히 살아라 이런 것을 기록하지 않고 인간의 실패를 기록해 놓았다. 인간이 다시 실패하지 말도록 미리 적어 놓은 것이다.

▶ 또 한가지 케이스는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이 순종해서 간 곳이 가나안 땅이다. 하나님은 이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이 계속 살기를 원했다. 그 가나안 땅 예루살렘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스도가 태어나길 원하셨던 것이다. 갑자기 기근이 벌어졌다. 이 땅에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다. 굶게 생겼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았다. 바로 언약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피신했다. 창세기 12장 1-3절에 주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이다. 상황을 보고 나서 생각이 난 그대로 언약의 땅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애굽에 가서 아내를 잃어버릴 뻔했다. 느낌대로 움직이게 되면 그런 일이 꼭 벌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분대로 움직이면 그렇게 된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기분대로 느낌대로 상황을 살피며 살아야 된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주인이 따로 계시는 것이고 삶의 원리가 바뀐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삶의 기준이 바뀐 것이다. 받은 말씀을 붙잡고 나가는 것이다.

▶ 모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시려고 불렀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자신의 형편을 살펴보니까 안될 거 같았다. 나이가 많고 돈이 없고 데리고 다닐 제자들도 없었다. 도저히 애굽 땅에 가서 바로왕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형편을 살펴보니까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3장 10절에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정이고 내 사정을 보니까 안되겠다 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래서 모세가 사실 이때 죽을 뻔했다. 모세의 아내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

▶ 또 다음 케이스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간 10명의 정탐꾼이다. 지도자 모세가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뽑아내어 가나안 땅에 쳐들어가기 전에 미리 살펴보라고 명령했다. 40일 만에 12명의 정탐꾼이 돌아왔다. 그 12명이 백성들과 지도자 모세에게 보고를 했다. 12명중에 10명은 사실 그대로 이야기를 했다. 본 느낌 그대로 이야기를 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지만 장대한 거인들, 가나안 족속들, 네피림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성읍은 견고하고 크다. 우리들은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이고 들어가게 되면 죽는다고 보고를 했더니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심했다. 낙심을 하면 한두 사람은 불신앙의 말을 한다. 괜히 애굽에서 나왔다. 돌아가자. 저 노인 모세의 말을 듣고 괜히 나왔다고 한두 명이 불평불만을 하니 전 백성들이 데모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2명의 정탐꾼이 분연히 일어났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이실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거인이라고 할 지라도 그들의 주인은 이미 떠났다.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땅을 우리에게 붙이셨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이 그렇게 믿음으로 보고를 드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 소리를 들은 하나님께서 열 받으셨다. 전부 멸하고 모세의 후손을 통하여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서 들어가겠다고 하나님께서 천명을 하셨다. 원망하고 낙담한 사람들을 죽인다는 말이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구를 드렸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모든 불신앙 하는 백성들을 죽인다면 주변국가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큰 기적을 베풀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빠져나오게 했는데 광야에서 다 죽였다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 ‘다 죽이지 않겠다. 그러나 믿음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다. 기성세대 말고 1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만 들어갈 것이다.’ 느낌대로 기분대로 믿음대로 하지 않았던 그 어른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돌아다니다가 전부 죽었다. 여러분들 기억해야 한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착하게 살고 열심히 산 사람들의 기록이 결코, 절대 아니다. 가진 게 없고 인격이 부족해도 믿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사용하셨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빨리 눈치채야 한다. 여러분의 목숨을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다. 세상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의 느낌, 감정, 감각, 경험 대로 살아간다. 그 중에 택하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믿음을 갖게 하신다.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축복하신다. 그 이야기이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는 바로 그런 종교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저는 솔직하게 이 교회를 기독교,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불교나 유교나 모슬렘, 카톨릭 같은 여러 종교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을 결정 짓는 것이다. 즉,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셨다.

▶ 많은 믿음의 사람이 있는데 또 한 경우를 보겠다. 사울왕이다. 사울왕은 얼굴도 잘생기고 전쟁도 잘하는 용맹한 장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적군의 큰 거인 장수가 나타난 것이다. 골리앗이었다. 이 골리앗의 키가 얼마나 컸던지 이스라엘 군대가 나가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골리앗 장수가 조롱을 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니 나와서 한번 싸워보자 라고 40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렸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겁을 먹어서 나가지를 못했다. 사울왕이 아이디어를 짜냈다. 골리앗 적장과 싸워서 이기면 딸과 돈을 주겠다고 포상을 제시했다. 아무도 안 나갔다. 그때 심부름을 하러 갔던 다윗 청년이 그 모습을 봤다. 양들을 키우는 목동 다윗이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돌을 던져서 사자와 곰을 때려잡았던 다윗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시를 쓰는 다윗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5번씩 정시기도를 하는 다윗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다윗이었다. 그런 다윗이 여호와를 멸시하는 골리앗을 봤다. 그때 믿음으로 돌을 가지고 나갔다. 한방에 끝냈다.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랐다. 적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다윗은 영웅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박수를 치고 잔치를 벌였다. 잔치를 할 때 여성들이 노래를 했다. 적을 죽인 자,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다. 사울이 그 소리를 듣고 불쾌히 여겼다. 다윗이 나보다 열 배 인기가 많다면 나중에 나라를 얻겠구나 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부터 사울왕은 다윗을 주시했다고 되어있다. 죽이겠다는 뜻이다. 민심을 들어보니 인기가 다윗에게 집중 되어있었다. 분위기를 파악해보니까 자신이 왕의 자리를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다윗을 죽이기로 고민을 했다. 사울왕은 다윗 청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사울은 결국 우울증에 빠지고 귀신이 들렸다. 나중에는 전쟁에서 졌다. 전쟁에서 진 것 부끄럽고 창피해서 자기 스스로 자살을 했다. 자신의 기분과 느낌에 따라 왕의 권력을 사용했던 사울은 비참하게 죽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을 때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셨다.

▶ 마지막 케이스이다. 예수님을 향한 군중들이다. 예수님이 3년반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할 때 엄청난 기적을 많이 일으켰다.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귀신들린자를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 이때 이스라엘 군중들은 생각했다. 대단하다. 하나님의 선지자로구나. 이분을 왕으로 모시게 되면 우리는 굶지 않겠구나. 우리를 식민지로 삼고 있는 로마에서도 승리하겠구나. 그러면서 호산나, 왕이여 이리 오소서 하면서 박수를 쳤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로마병사에게 체포를 당했다는 것이다. 두들겨 맞고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면서 기어가는 것을 보고 나사렛 청년 예수가 무슨 일이길래 왜 기적을 안 베풀고 능력을 안 일으키는가? 나중에는 십자가에서 죽는 그 상황을 본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예수 시대는 끝났구나 저 사람의 운은 거기까지 구나 라면서 군중들의 마음은 돌변하였다. 바나바 강도를 살려주고 저 예수를 죽이라고 돌변했다. 군중들이 어떻게 판단한 것인가? 상황의 흐름을 보고 결정한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죽였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1900년 동안 어마어마한 핍박과 고난이 계속 되어졌다. 재산을 잃고 집을 빼앗겼다. 추방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 이스라엘 고난의 역사는 여러분이 보시면 깜짝 놀랄 것이다. 제가 사료를 찾아보면서 너무나 힘들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고 죽일 수 있구나를 보면서 종교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제가 지금 이스라엘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쳤다. 예수님을 죽여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수님을 수용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것이 군중들이 생각한 것 때문에 그렇다. 결국에는 그 생각 때문에 벌어진 결과가 2000년간 나라를 잃고 후대들은 작살난 것이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한사람에 의해서 이스라엘 사람 육백만명이 학살 당했었다. 제가 지금 히틀러가 잘했다 잘못했다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죽였던 군중들 때문에 그들의 후대가 완전히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섯 가지 경우를 소개, 전달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자신도 망하고 후대도 망하는 길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실제적인 예를 성경에 기록해놓았다.

▶ 그러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느낌대로 한 사람도 있지만 믿음으로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아까 창세기 3장을 봤다. 아내 때문에 남편인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앞에 범죄를 했다. 그래서 저주와 고난의 인생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한줄기 소망의 약속을 주셨다.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이다. 여자의 후손에 관한 약속이다. 여자를 통해서 메시아가 올 것이다. 사단의 머리를 깰 것이다. 흑암저주를 이기고 승리케 할 것이다. 여자로부터 메시아가 온다고 아담이 붙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내를 부를 때 이브라고 불렀다. 생명의 어미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자신의 삶 가운데 믿음으로 적용한 것이다. 여자를 통해서 메시아가 올 것이니 당신은 그 메시아를 낳을 어미다 라는 말이다. 물론 하와를 통해서 예수가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후대를 통해서 태어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담이 그것을 믿음으로 붙잡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들의 수치를 하나님이 가려 주셨다. 작은 믿음의 적용 하나가 인생 전체의 수치를 가리우는 복을 받은 것이다.

▶ 아브라함은 처음에 믿음이 없었다. 나중에 창세기 22장 즈음에 가면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지체없이 이삭을 데리고 바치러 갔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자손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다. 이삭이 제물로 받쳐져서 죽는다고 한들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아들 이삭을 잃은 이후에 또 다른 아들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이고 하나님이 그 믿음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수양을 준비하시고 이삭을 살리셨다. 그리고 또 중요한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이 느낌대로 하지 않고 믿음대로 행해서 아들도 살리고 축복에 더 큰 언약을 받았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이다. 느낌대로 행했다면 어떠했겠는가? 아들 이삭을 줄 때는 언제이고 지금은 왜 바치라는 것인지, 정말로 데리고 가야 하는지, 이삭에게 말은 해야 하는지 여러가지 느낌과 생각이 올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붙잡고 나아갔다. 아들을 살리고 더 큰 축복을 받았다.

▶ 모세도 처음에는 불신앙을 했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애굽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끌고 나왔더니 홍해가 앞에 있었다. 배는 없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두려워하고 원망, 불평을 했다. 이때 모세가 믿음을 고백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봐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군대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모세의 믿음 고백 대로 모든 애굽의 병사들이 물에 수장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바람을 통해서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건너가게 되었다. 모세 한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대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까 이야기 했던 가나안 정탐꾼들 중에서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통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까지 들어갔다. 그들이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승리케 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가나안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믿음의 고백을 하나님이 받으셨다. 여러분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기를 바란다.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이유이다.

▶ 이 세상 70억 인구는 전부다 느낌대로 살아간다. 세상중심, 육심중심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너희는 믿음으로 살아라. 말씀 붙잡고 살아라. 은혜로 픽업하시고 부르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증거를 보이려고 하신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그 모든 인류를 나중에 다 부활시키시고 심판하신다. 그 심판 할 모든 영혼들 앞에 증거하기 위해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 받고 승리한 것을 심판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샘플로 삼으시려고 구원시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천국에 보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증거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 말씀 따라가는 자.

▶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사울왕은 다윗의 장인어른이다. 장인이 사위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윗은 도망 다녔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을 때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 있었다. 나이도 젊고 기술도 있는데다가 죽일 수 있는 명분도 있었다. 사울왕은 귀신이 들려 있었고 나랏일을 팽개치고 개인감정 때문에 다윗을 추적하고 있었다. 귀신들린 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꿀 수 있었다. 명분이 있었지만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번 사울왕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이 다루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손댈 수 없다. 하나님이 필요 없으면 하나님이 불러 가실 것이다는 말이다. 그 믿음대로 다윗은 도망 다녔다. 사울왕을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살려줬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받으시고 다윗을 향해서 칭찬하셨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로다.’ 결국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되었다.

▶ 십자가의 예수님도 같은 믿음을 갖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3장에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무지몽매한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그 믿음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결국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모든 이름에 뛰어난 이름을 소유했다. 극명하게 또렷하게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느낌 생각인가? 감정 감각인가? 아니면 말씀을 붙잡는 믿음인가? 여러분들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로 부르신 줄 믿는다.

 

3.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시간표를 믿고 사는 자들이다.

▶ 마지막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때, 시간표를 믿고 따라가는 자들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믿고 있다. 그것을 조금 더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잘 믿기 때문에 약간 교만한 경우도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신차리라고 하신다. 결국에는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다른 용서받을 자를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신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이시다.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통하여 구원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향해서 자신의 가슴을 여셨다. 내가 원하는 것과 소원은 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한다. 너희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라.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 소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나를 구원하셨다. 성령의 권능을 붙잡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목사님이나 선교사님 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전부 평신도들이 현장에 나가서 전도했다. 내일부터 나가서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부담 느끼라는 말이 아니다. 여러분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정말로 동행하고 축복을 누리게 되면 응답이 온다.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나온다. 기분 좋은 일이다. 축복의 삶이다. 그러면 내가 받은 응답을 들을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다. 그러면 그때 말하면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구원하시고 이런 소박한 응답을 주셨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러분이 그것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그것만 원하신다. 세상을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또 한가지 믿을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로고스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개인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다. 그것을 레마라고 한다. 내게 주시는 음성이 있다. 그 말씀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믿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응답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언약, 신언약이라고 한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다. 여러분들은 언약의 백성이고 여러분의 인생은 언약의 인생이다. 이 언약을 붙잡고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이 일을 일으키시고 축복, 증거를 주신다. 그러면 내가 아무 사람이 없는 무인도에 있어도 내 증거와 축복을 들을 사람을 보내신다. 하나님이 앞으로 하신다. 그런 체험을 하다 보면 여러분의 신체 속에 엔돌핀이 생기고 다이돌핀이 분비 된다. 그러면서 강건 해지게 되며 생각과 마음이 밝아지게 된다. 나는 죄인이 맞는데 어마어마 하신 하나님이 나를 돕고 이끌고 계시는구나 라는 확신이 생긴다. 담대함이 생긴다. 이 분이 만약 나의 아버지가 맞다고 한다면 거칠 것이 없고, 막힐 것이 없고, 제한이 없겠구나 라는 담대함이 생긴다. 우리 육신적인 아버지께서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는 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쉽게도 그렇게 대단하신 분도 제게 복음 하나를 알려주지 못했다. 너무 안타깝다. 그러니 자녀들이 복음 하나를 몰라서 생고생을 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복음을 통해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응답 받게 하실 것이다. 하나 더 볼 것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온다.

 

♠ 결론

▶ 결론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 바울이 고백을 한다.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갔다. 내 여행이 끝났다 그러면서 내 믿음을 지켰다고 나와있다. 신앙생활은 믿음의 싸움을 하는 것이 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후부터 이 믿음의 싸움을 한 것이다. 상황을 따라간 것이 아니고 말씀을 따라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을 붙잡고 환란도 통과한 것이다. 그랬더니 하늘의 의의 면류관을 예비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이런 자로 부름을 받았다. 믿음의 싸움을 하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말하시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기도하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한 평생 사시기를 축원한다.

▶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실제적인 예를 교훈 삼게 하옵소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옵소서.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의 싸움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