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은 겸손과 용서를 원한다

July 2nd, 2017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낮은 자세는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 유명한 철학자 한 분이 늙어서 곧 죽게 되었습니다. 수제자가 스승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스승이 누워서 힘겹게 말씀하십니다. ‘고향을 지나갈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가거라.’ 수레에 탔다는 이야기는 높은 사람이 됬다는 말입니다. 요즘 같으면 고급 리무진 세단을 타고 가게 된 것입니다.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네, 선생님. 어디에 살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군요.’ 차,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행동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스승이 다시 말씀했습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갈 때는,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거라.’ 제자가 바로 대답했습니다. ‘네, 선생님,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죠.’ 높은 나무는 그 숲에서 키가 가장 크고 수령, 나무의 나이가 가장 많은 것입니다. 종종 걸음이란 것은 걸음의 폭을 짧게 해서 어른이나 임금님 앞을 지날 때 걷는 겸손한 걸음 걸이 입니다. 높은 나무를 지날 때 종종 걸음으로 가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제자는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번에는 스승님께서 입을 크게 버리시더니 '내 입 속을 보아라. 내 혀가 있느냐?' 물었습니다. 제자가 ‘네,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내 치아가 있느냐?’ 물론 그 노스승께서는 나이가 많으셔서 치아가 다 빠지고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 스승은 바로 제자에게 바로 되물었습니다. ‘알겠느냐?’ 제자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지만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 다는 뜻이군요.’ 그러자 스승은 돌아 누웠습니다. ‘천하 세상에 일을 내가 다 말했노라. 더이상 할 말이 없다.’ 이빨은 딱딱 하고 굳센 것이지만 먼저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혀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오래 남아있습니다. 이 노스승께서 이빨과 혀의 차이를 보여준 것은 부드럽게 남을 감싸고 약한 자처럼 보이지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야 말로 오랫동안 복을 받고 승리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 힘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가서 망하게 됩니다. 이 노스승이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고향을 잊지 말아라. 어른을 공경하라, 부드러운 겸손함으로 강한 교만을 이겨라. 그런 뜻일 것입니다. 곧 죽은 그 스승의 이름은 '상용' 입니다. 상용이란 스승의 마지막 말씀과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노자'입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불신자 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원리나 인생의 이치를 꽤 뚫고 있었습니다. 노자의 사상이 한때 중국 대륙을 장악 했었습니다. 지금도 현대인들이 노자의 사상에 심취매료되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인생의 중요한 이치가 담겨있기 때문에 남겨놓으신 것 일겁니다. 우리가 이러한 노자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 또는 추앙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교회를 때려 치고 중국으로 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내려놓고 노자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현장에 답을 줘야 합니다.

 

1. 하나님이 높이실 만큼 겸손하라. (벧전5:5-6)

▶ ‘겸손하게 살아라.’ 다 아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버렸습니다.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아무리 겸손하고 착해도 인생의 저주와 재앙을 그 누구도 해결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인생 모든 문제가 해결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택정을 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취소 못합니다. 예정설이던 그 어느 교리를 갖다 대도 부인 못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과거가 그랬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확정된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 있기 전에 택정된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확정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천국에 간다는 보장입니다. 과거, 미래, 현재 다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다툴필요없이 양보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끝난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해야 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찾아야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겸손하게 살아서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고 보통사람으로 잘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영원한 영적 세계 앞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무시 당하지 않고 존경 받는 정도가 아니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찾고 누려야 합니다.

▶ 겸손,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움을 할 때 자세를 낮추는 것이 기본 자세 입니다. 자세를 낮추는 것은 쉽게 넘어지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넘어지게 되면 싸움에 필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인 신앙생활을 할 때도 자신을 낮출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를 낮춰 버리게 되면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는 자가 있었습니다. 한때, ‘기름 부름을 받은 자’ 라고 불리우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욥기, 이사야서, 에스겔서에 나오는 사탄입니다. 겸손하지 못해서 교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 완전히 추방당했습니다. 완전히 추락됐습니다. 사탄 마귀가 온 우주에 공허, 혼돈, 흑암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주의 최초 문제 입니다. 그 작자가 땅에 출연해서 인류에 첫번째 문제를 일으킵니다. 창세기 3장 선악과 사건입니다. 인간을 장악했습니다.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창세기 6장 네피림 사건을 터뜨렸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단이 한 짓입니다.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만 때문에 큰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우주와 인류에 원죄 사건 저주와 재앙, 엄청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겸손치 못한 교만, 이것이 사단의 성품이요, 본질입니다. 사단의 영역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겔 28장에 말하고 있습니다. ’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그래서 사단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이 세상의 임금과 신이 된 것입니다. 온 인류를 사망 권세로 장악해서 지금 지배 중 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두가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잘 하고 싶은데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만 폭로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에서 하버드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육군사관학교나 MIT 에서 이것을 못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만큼 사람은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과하는 만큼 우리는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흑암 세력, 사단 마귀의 세력이 공격하고 지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0절 말씀입니다. 따로 훈련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우상숭배 합니다. 종교는 믿더라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를 하니까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터지는 것이 정신 문제, 육신 문제 입니다. 우울증에 걸립니다. 중독 증세도 많습니다. 컴퓨터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술 중독, 담배 중독에 다 걸려있습니다. 육신 문제는 어떻습니까? 몸은 아픈데 병원가면 진단이 안 나오는 것이 많습니다. 불치병, 난치병 많습니다. 질병은 안 걸리더라도 육신적인 삶이 계속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다 죽어서 지옥에 갑니다. 내세 문제 입니다. 자기만 지옥에 가면 괜찮은데 망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고 갑니다. 자식들에게 멸망의 유산을 넘겨주고 가게 됩니다. 출 20:4-5절 말씀입니다. 그래서 과학 문명이 발전해도 인간의 삶은 전부 힘들어 지게 됩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사단의 끝없는 횡포와 발악 때문에 전부 무너지게 됩니다. 이 자를 꺾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자의 모든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을 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포하셨습니다. 창 3:15절 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올 것이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가 올 것이다. 이것을 붙잡는 자는 영원히 승리했습니다.

▶ 사단은 지금도 끝없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불화,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다투고 싸우며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싸우게 하는지 아십니까? 서로 싸워야 피차 물고 물어뜯어서 멸망할까 하노라. 성경에 답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장 입니다. 같이 싸우면 전부 망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여기에 속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겸손해야 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사야서 14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네 마음에 말하는 구나’ 어떤 마음이냐 하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보좌를 만들 것이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서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단의 교만을 정확히 꼬집은 성경 말씀입니다. 사단 마귀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아닙니다.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등하게 서보려고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높였습니다. 그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땅에 추락했습니다. 땅에 임한 마귀가 모든 인류를 속여서 죄를 범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마귀의 자녀로 살다가 지옥에 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뒤집어서 영적 판도를 바꾸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분을 견고히 붙잡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고 붙잡게 되면 하나님이 일을 하십니다. 우리 중심에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빌 2장에 답이 나와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아니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웠다. 종의 형체를 가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실 만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사단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대등하게 되려 했습니다. 스스로 높였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대등한 분이신데 대등하게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스스로 높이지 않고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어디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내 주인으로 영접하는 순간에 영적 판도가 바뀌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속였지만 주님은 우리를 속이지 않고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귀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지만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재앙에 빠뜨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회복시키셨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지옥까지 끌고 가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천국 보좌 위로 올려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분이 아니십니다. 인류의 근본적인 재앙, 문제를 일으키는 사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지옥 끝까지, 지옥 밑까지 인간을 끌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 보좌의 위까지, 하늘 보좌의 위까지 올려 놓으셨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6절 말씀입니다. 우리를 완전히 바꿔 놓으신 것입니다.

▶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빌립보서 2:5절에 나와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무슨 마음입니까? 자신을 낮추고 죄인인 우리를 높이시는 겸손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 18장에 보시게 되면 예수님이 강조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어린 아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자기 중심이고 칭얼거리면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낮출 만큼 나의 실체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빛 앞에서 ‘나는 주님 없으면 안됩니다. 나는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때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빌립보서 2:9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런 마음을 품을 때 하늘 보좌 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겸손해서 칭찬 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수 많은 세월 가운데 흑암세력이 벌려놓은 일을 완전히 뒤집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사단 마귀에 있어서는 굉장히 굴욕적인 일입니다. 전부 다 사단 반대로 했습니다. 사단은 저 밑에 추방당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사단 마귀는 한번도 그렇게 할 마음도 없었고 그렇게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사단의 마음에는 없는 그 마음을 품고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늘과 땅에 모든 권세를 주님이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흑암의 세력이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시작은 겸손이셨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이 땅에 내려 올 만큼 겸손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과정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죽으심을 순복 할 만큼 겸손 하셨습니다. 그분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모든 권세를 거머쥐셨습니다. 우리를 용서 하셨습니다. 우리를 회복하실 만큼 섬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 분이 내 안에 주인으로 들어와 계신 것 입니다.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 남은 것입니다. 나는 뒤로 가고 그리스도만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나의 인격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가장 기초적인, 기본적인 삶입니다. 즉,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겸손이 나와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용서하심과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 겸손으로 성도를 섬기고 용서함으로 교회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겨라.’ 어느 정도 용서를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해라.’

 

2.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 만큼 용서하라. (엡4:32, 골3:13)

▶ 결론을 내리면 그리스도가 없는 자의 겸손은 겸손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지만 흑암, 저주, 재앙에서 인생의 승리는 못 가져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용서는 참 용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진리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겸손과 용서만이 참 겸손이고 참 용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깊게 들어간 만큼 진짜 겸손과 용서를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참 겸손이야 말로 형제들을 실족치 않게 한다. 바르게 섬길 수 있다. 라고 마태복음 18장에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체질적으로 사람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사람의 죄를 정하고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무한적으로 용서했기 때문에 우리가 영혼들을 향해서 무한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을 누림으로 섬기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님들을 향해서, 내 주위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가끔 그런 사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말, 이상한 짓 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과 같이 잘 안 어울려 하고 싶어 합니다. 뒤에서는 손가락질 합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실상 그 사람도 몸부림 치는 것입니다. 나를 좀 바라봐 달라 그 뜻입니다. 나를 좀 품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소리 높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강한 행위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봐달라고 하니까 봐주면 됩니다. 품어 달라고 하니까 품어주면 됩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야 말로 그리스도의 용서와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영혼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한 용서를 하는 이유는 그 영혼을 회복 시키는 것입니다. 내 인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과 심령이 시원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피를 흘렸 노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섬김이 나오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3. 겸손과 용서는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 이 거룩한 날 자꾸 마귀, 사탄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마귀의 끝 없는 횡포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의 거룩한 명예가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뒤집은 분이 바로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는 그 그리스도 통해서 주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입니다.

▶ 서론에 고향 생각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부드러운 겸손으로 강한 교만을 이기라고 서론에 말씀했습니다. 눈이 열리게 되면 다르게 보입니다. 나, 내 자식, 내 교회, 나 이렇게 살다가 눈이 열리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영원히 갈 천국 본향,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내가 겸손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부모님을 섬기다가 눈이 열리게 되면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되겠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수 천년 동안 마귀가 더럽힌 우주와 인류, 아버지의 명예를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셨구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아들 된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리라.’ 이런 깨달음 안에서 겸손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생이 철들게 되면 자기의 유익을 넘어서 고향도 살피게 되고 부모님, 일가 친척을 보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교회, 하나님의 나라 살피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한적으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을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가 현장에서 이기게 됩니다. 내 자신을 이기게 됩니다. 경제와 물질을 이기게 됩니다. 대인관계를 이기게 됩니다.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됩니다. 이게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밀고 가는 구나 알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일 평생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복음 안에 있는 참된 겸손과 용서를 찾게 하여 주옵소서. 훌륭한 인격과 성품 덕분에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영원히 만나 뵙고 함께 살아야 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참된 겸손과 용서의 비밀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래서 흑암세력을 이기고 참된 승리와 정복을 찾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