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다락방의 사람들 (6) -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

March 10th, 2019

ICA Sunday Pulpit Message



♠ 서론

▶ 우리가 지나가다가 보게 되면 가끔 짓다가 중단된 건물들을 보게 된다. 공사비가 모자라서 일할 사람을 못 구하고, 일할 사람이 없다 보니까 건물을 미쳐 다 짓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공사가 오랫동안 중단된 건물을 시간이 지나서 보면 흉측하기도 하다. 이렇게 세상 일은 미처 다 끝내지 못하고 중단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러나 세상 일과는 달리 하나님의 일은 어떠한가? 성경 한 구절을 말씀드리겠다. 누가복음 19:40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상황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는 공생애 기간이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나귀를 타고 예수님께서 왕 대접을 받으며 도시 안으로 들어갈 때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래서 누가복음 19:38절에 보면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라며 사람들이 외치고 난리가 난 것이다. 마치 콘서트를 방불케 할만큼 열기가 뜨겁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연호, 환호 하면서 호산나 외쳤다. 39절에는 어떤 바리새인들이 짜증이 난 것이다. 그러면서 바리새인 몇명이 예수님께 직접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이렇게 시끄럽게 굴지 말도록 사람들을 멈추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저 같으면 알았다고 했을 텐데 예수님을 달리 말씀하셨다. 만일 이렇게 연호하고 환호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이 멈추어 잠잠하게 되어지면 돌들이 일어서서 입이 생기어 찬송하고 환호하고 호산나를 외칠 것이다 라는 말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고 찬송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돌들이라도 사용해서 찬송하게 만들고 찬송 속에, 호산나의 외침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는 이 일을 완성시키실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루실 일을 위하여 사람을 사용하시는데 사용할 사람이 안 생기면 돌이라도 취해서 그 일을 끝내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게 되면 반드시 나를 통하여 그 일을 완성하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 우리는 살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당한다. 일을 하면서 의심, 의문, 고뇌 가운데 빠지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 절망하거나 낙심에 빠지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 사건이 터지고 위기를 당하기도 한다.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멸망하기도 한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일 속에 들어가서 내 일을 하게 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 반드시 응답 받고 축복 받으며 증거를 얻게 된다. 성공하게 되어진다. 그래서 눈치가 빠른 학생들은 하나님의 일 속에서 공부를 한다. 보통 아이들은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다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서 신앙생활을 하겠다. 좋은 직장을 얻고 나서 헌신하겠다. 돈 많이 벌어서 중직자 생활 하겠다. 바쁘니까 아이들을 키워놓고 신앙생활 하겠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 속에서 공부도 하고 직장이나 사업도 하며 자녀 교육을 시키게 되면 모든 것을 성공하게끔 되어있다. 여기서 한가지 다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루실 일을 위해서 반드시 사람을 쓰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나왔던 마가다락방의 사람들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답하라.

▶ 첫번째이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이야기다. 많은 일이 있지만 중요한 몇가지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 우선은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신다. 무슨 말인가? 성경 이사야서 43:7 이런 말씀이 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알고 있지만 세상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실상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 의식이 거의 없었던 이유가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떠나버렸다.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주인 되심에 대한 의식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사람도 오랫동안 교제가 끊기고 관계가 소원해지면 생각에서 없어지게 된다. 똑같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사악한 존재가 관련되어있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일을 한  존재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사악한 영적 세계에 굴복하며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운명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운명에서 벗어날 사람은 없다. 증거로 모든 사람들은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게 되어있다. 살면서 고생하고 결국에는 죽어서 끝 모르는 세상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엄밀하게 보면 비참한 생을 사는 것이다.

▶ 이런 운명에 빠진 모든 인간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칼을 빼 드셨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말씀의 검을 가지고 이 땅에 한 분을 보내신 것이다. 말씀의 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원래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다가 그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절이 바로 그 말씀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스스로 인간의 운명 속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우리와 똑같이 갇히신 것이다. 어떤 운명에 그분은 갇혔는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에게는 무엇이었는가? 그분이 잉태되고 난 다음에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운명에 갇혔다.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이었다. 자기의 씨가 아닌 것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다.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또 다른 증거 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께서 태어나고 나서 요셉 아버지가 떠났다고 한다면 유복자가 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시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나 아버지 없이 크는 사람을 본다. 무언가 갈급한 채로 성장한다. 예수님이 그런 운명 가운데 태어나신 것이다. 가까스로 성령의 개입하심으로 요셉이 떠나지 않았다. 똑같은 운명에 빠지실 뻔하셨다. 또 한가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다른 유아들과 함께 학살될 운명에 처하셨다. 당시 헤롯왕이 2-3세 이하의 모든 아이들은 전부 다 죽이라고 명령해서 그때 전부 다 몰살되었다. 그때 역시 하나님의 큰 은총으로 간신히 피난을 했다. 이때 산모, 임산부 마리아에게 정신적인 충격이 갔을 것이다. 약혼자 요셉의 씨가 아닌 것 때문에 걱정하면서 마음에 부담이 됐었을 것이다. 주위의 모든 어린 아이들이 다 죽어가는데 내 아이도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심적 부담이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남편에게 차일 뻔하고 내 아이가 죽을 뻔한 위기에서 큰 타격이 오게 된다. 이런 충격적인 상황이 예수님에게는 운명이었다. 출산할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다. 이것을 왜 운명이라고 하는가? 이미 다 예언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크고 나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함께 다니는 지인에게 배신 당하고 몇 푼에 팔릴 운명이 예수님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가룟 유다에게 팔리고 그 운명에 갇혔다. 이게 다 예언되었고 그렇게 살도록 운명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주위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병자를 치유해주고, 가난한 자에게 먹이시며, 많은 절망에 빠진 자들을 돕고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위대한 분이셨다.

▶ 그런데 갑자기 로마 군에게 잡혀가서 십자가 처형 할 때 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아무리 봐도 예수 청년은 죄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 같이 잡혀있던 바라바 라고 하는 극악 무도한 죄인과 예수 둘 중 하나를 석방시켜준다고 수를 놓았다. 이 바라바는 강간, 강도, 모든 악행을 범한 악질 중에 악질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것을 제시하게 되면 저 바라바를 죽이고 예수를 풀어주라고 할 줄 알았지만 그들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먹은 사람들이다. 철저히 배신을 당한 것이다. 배신 당하기로 작정 되어있는 운명이었다. 죽도록 심하게 두들겨 맞고 침 뱉음을 당하며 가시 면류관을 쓰고 무시당하고 조롱 당한 운명이었다. 요즘에는 빨리 편하게 죽고 싶어서 안락사를 요청한다. 한국의 망나니처럼 칼로 쳐서 끝내면 좋을 텐데 두들겨 패고 침 뱉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허리를 찌르고 다리 부러뜨리고 팔과 다리를 못박았다. 극도로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심으로 그 운명 가운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성경에 이런 것이 이미 다 예언됐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런 운명을 갖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우리와 똑같은 운명에 빠져 사셨다.

▶ 그런데 그러한 운명을 깨고 다시 부활하신 것이다. 승천하셨다. 무슨 뜻인가? 죽으면 끝나는데 죽음에서 다시 출발하신 것이다. 즉, 인간의 운명을 쥐고 있는 사단의 목을 친 것이다. 참으로 유일무이한 사건을 그분이 손수 일으키신 것이다. 운명을 깨뜨린 것이다. 부활하신 것이다.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은 그 다음부터이다. 인간의 운명을 박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고백하는 자마다 인생의 모든 운명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운명을 해결하신 그 분을 내 마음 속에 영접으로 기도하게 되면 내가 공짜로 운명에서 벗어나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어주시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주인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다. 기가 막힌 약속이다. 그 약속의 증거로 우리가 죽어도 살겠고 아니면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1:25-26절 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운명에 있었던 내가 이 운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나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 가난의 운명, 질병의 운명, 전쟁 같은 삶의 운명이 싫어서 끝내고 싶다, 새로운 삶의 축복을 누리고 싶다.’ 그런 분이 계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초대하면 된다. 그리고 고백하면 된다. 이 말씀이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성령으로 생각과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즉, 부르고 계시다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싶다면 기도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지금 이 시간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운명에서 해방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드립니다. 나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 지금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응답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영접을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몸 속, 영혼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내 의지나 실력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 또 한가지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교회 안으로 부르신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4:23 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부르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인 것을 믿어야 한다. 상황적으로 오늘 교회를 가봐야 하겠다 하며 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나의 생각 같지만 하나님이 허락을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것이다. 교회 예배에 친구의 권유로, 부모님의 강요로,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사용하여서 내가 이 자리에 앉게끔 한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은혜요, 사랑이다. 예배에 나오고 싶어도 아내만 교회에 데려다 놓고 차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교회에 들어오고 싶은데 못 들어온다. 그게 하나님이 안 열어주시면 못 들어오는 것이다. 내일은 꼭 예배에 가야지 그렇게 결단, 결심해도 하나님이 안 열어주시면 못 오는 것이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으로의 부르심이다. 주님을 찬양한다. 그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축복하신다.

▶ 더 중요한 부르심이 하나 있다. 마가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현장을 위한 부르심이다. ‘함께 있게 하시고’ 구원의 축복과 임마누엘의 축복이다. 그리고 ‘함께 나아가 전도도 하며’ 현장 부르심이다. 이때 귀신을 내쫓는 권세도 주신다고 하셨다. 현장에 구원 받을 자를 찾아서 살리라고 하는 부르심이다. 함께하심으로 즉,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자들은 구원받을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 불신자를 붙잡고 있는 귀신의 세력을 추방시킬수 있는 권세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체험 해보셨는가? 정말 크나큰 인생에 결정적이고 귀한 체험이다. 기억하시기 바란다. 세상으로부터의 부르심, 구원이다. 교회 안으로의 부르심, 예배이다. 현장을 위한 부르심, 전도와 선교이다. 이 응답에,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는 반드시 응답 받고 축복 받으며 놀라운 증거를 얻게끔 되어있다. 참된 인생의 행복을 그때 누리게끔 되어있다. 여러분들이 먹고 사시느라 이런 체험을 많이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저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들의 후대, 자녀가 있다. 여러분의 자녀들 만큼은 이 체험을 하고 세상에 나가도록 도와주셔야 한다.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 있게끔 해야 한다.

 

2.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자들이었다.

▶ 이런 엄청난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 사람들이었다. 오늘 성경 내용을 보면 오순절 날 많은 사람들이 여러지역에서 모였다고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현대인들인 우리에게 낯선 지명이 많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굳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을 해놓으셨는가? 설명을 드리겠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은 이것은 흑해, 카스피 해 쪽에 있는 동네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 메소보다미아는 인류의 문명이 일어났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살던 유대인들이다.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는 이스라엘 북쪽 넘어에 살던 유대인들이다. 그리고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에서 온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떠나 남서쪽으로 아프리카 지역까지 흘러 들어갔던 유대인들이다.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라는 말은 서방 지역에 살다가 온 유대인들이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은 섬 지역, 남동쪽에 살다가 참석한 유대인들을 말한다. 그쪽 사람들이 아니라 유대인인데 그 쪽에 갔다가 온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고향 땅을 떠나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다가 오순절 대 명절을 맞이해서 모인 유대인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그들이 고향 땅을 벗어나 그 멀리까지 가서 살아야만 했는가? 어차피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같은 큰 명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 한다. 왜 멀리까지 가서 고생을 하는가? 그들이 좋은 나라로, 꿈을 이룰 나라로, 인생 역전 할 나라로 이민을 간 것이 아니다. 전쟁과 포로 등 각종 사건과 재앙으로 쫓겨가고 포로로 끌려가고 흩어졌던 자들이다. 거기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묶여 있다가 자리를 잡고 아이들이 크니까 쉽게 다시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즉, 흩어지고 버려진 자들이라는 뜻이다.

▶ 당연히 상처받고 이방 땅에서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았던 자들이다. 낯선 타향살이를 해본사람들은 알고 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롭고 괴로운가? 무시를 받거나 편견, 또는 따돌림, 차별이 이민자들의 삶이다.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마가의 다락방에 부르셨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부으신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케 하신 것이다. 상처를 치유 받고 회복시키게 된 것이다. 성령의 능력, 권세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30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상처입고 버려짐을 당하며 쫓겨났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예비하시고 불러모으신 것이다. 그렇게 멀리 가서 고생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불러 모으신 것이다. 시편 107편에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마가의 다락방의 사람들을 불러모으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비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런 것을 빨리 적용하여야 한다.

▶ 만약 우리들 중에 살아가면서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로 인해서 씻을 수 없는 상처, 힘겨운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가 있는가? 그것은 한탄해야 될 신세가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시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 상처와 고통을 치유해 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 권세를 주시려고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믿으셔야 한다. 사실상 지금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왔다. 흩어진 자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남 모르는 상처, 고통 때문에 버려진 자처럼 보여질 수 있다. 내가 혼자 생각할 때, 남들이 볼 때는 흩어지고 버려진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숨겨놓고 예비한 자들이다. 아무도 모르는 이유를 두고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고 마음에 확정해야 한다. 내가 비록 멀리 여기까지 와서 살고 있지만 상처와 고통으로 날을 샐 만큼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예비하셨다. 영광스러운 부르심 안에 내가 들어가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믿으셔야 한다. 대부분 한국에서 떠나 오신 분들이 많다. 미국 사람들도 본토 미국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영국이나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사실 다 흩어짐으로 보낸 자들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증거이다. 그 부르심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무너지게 끔 되어있다. 이 미국이라는 땅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가? 무서운 동네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들이다.

▶ 세번째 결론이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예비하심을 받았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그 메시지를 듣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된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왜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비하셨는가? 이 세가지 결론을 마음에 담고 가셔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고 나타내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서 나오는가? 말씀에서 나온다. 그래서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즉, 기도하게 하려고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람을,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는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맡기지 않고 사람에게 맡겼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을 하여야만 전도가 되게 끔 되어있다. 고후 6:1절에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라고 나온다. 요한일서 1:3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즉, 하나님 앞에서 아들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성도들과 교제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 이름 붙잡고 기도한다. 이것은 응답 받게 하여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 기도, 하나님과 동역자 전도 때문에 예비 되었고 부르심을 받았다. 그 일을 위해서 상처 받았다는 자들을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버려진 자들을 불렀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이 미국 땅에 흩어지고 버려진 자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했음을 언약으로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언약을 붙잡는 것이다. 여러분께서 언약을 붙잡으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게 되면 반드시 그 삶은 형통하게끔 되어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하면서 전도와 선교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보장하고 책임지신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의 말씀, 기도, 전도를 붙잡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3 오늘의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3 오늘의 삶을 사는 자는 완벽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세상 끝날까지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 기도

▶ 기도합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시고 교회 안으로 부르시며 현장을 위하여 부르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마가의 다락방의 사람들처럼 언약을 붙잡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흩어져 상처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에 말씀과 기도와 전도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능력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했습니다. 아멘.